"마구간에서 난 예수": 번역과 문화적 연상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성경에는 2천여년 전 오늘, 해산날이 된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에는 머물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아기예수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을 연상하시는지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번역이 잘 되지 않거나 원어의 독자들과는 다른 문화적 상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 장면에서 보통의 우리 한국인들이 연상하는 장면도 예수탄생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문화적 현실과는 많은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도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에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머물 곳이 없음이러라. (누가 2:4-7. 개역번역 요약)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잘 모르겠는데, 제가 초딩 때 다니던 시골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거의 한달 내내 저녁마다 모여 연극이나 성경암송 따위의 축하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저 성경구절의 "여관(사관)"에서는 텔레비전 극 "전설의 고향" 따위에서 보여지는 주막을 연상했고, "마구간"에서는 제가 살던 곳보다 훨씬 더 시골에 있던 큰아버지집 또는 외가의 외양간이나 돼지우리를 연상했었던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 상상의 "마구간"은 지붕은 있지만 사방은 벽이 없이 터져있어 외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바닥은 짐승의 배설물로 질척질척 더러웠지요.  "아. 주막집 방이 모두 차서 그런 더럽고 추운 곳에서 낳았구나!"



 * 그림: 제가 어릴 적 상상했던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구글 이미지 검색)


그런데, 수년 전 성경번역에 대한 이러저러한 책을 읽어보다가 원문이 발생한 문화나 역사, 지리, 고고학적 배려가 없이 읽으면 저런 식으로 엉뚱한 상상을 하게되는 것이구나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번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성경에 "여관(사관)"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어 원문은 "카타뤼마"라 합니다. "카타뤼마"는 앞의 누가복음 구절 말고 신약성서에 두번 더 나오는데, 그 두 곳에서는 모두 "객실(guest room)"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보낼 "객실"을 구하도록 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그 유월절을 함께 하기 위해 찾은 "객실(카타뤼마)"로 "큰 다락방(아나가이온)"을 정해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다락방이란 다용도 창고 비슷한 의미니까 사람들이 들어가 활동할 방의 의미로서 적합한 표현은 아닌 것 같고, 본래의 의미로는 이층(윗쪽)에 있는 방의 의미로 씌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개역성경에서의 "큰 다락방(아나가이온)"이란 표현은 보다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된 공동번역에서는 "이층의 큰 방"으로 되어 있고, 영어성경(NIV)에서는 "upper room"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여관(사관)"이라고 번역된 "카타뤼마"의 성경에서의 다른 용례를 보면 과거 우리나라 식의 주막이나 현대의 여관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일반적인 공간(객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식의 주막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하는 장면(누가 10:34-35)에 나오는데, 거기서는 "판토케이온"이라는 별도의 그리스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隊商路나 중앙도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인데 그런 곳에 여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좀 엉뚱해 보이고, 요셉이 고향마을에 호적하러 갔다면 특정 친지나 여염집을 찾아 해산하며 머물 "객실(카타뤼마)"를 찾았을 것 같은데 그게 없거나 다른 사정이 있어서 "마구간"을 차지했다고 보는 게 적합한 것 같습니다. 

여관이라는 말은 그렇다치고, 다음으로 "마구간"이란 말이 여전히 문제인데, 팔레스타인의 마구간은 한국 사람들이 연상하는, 바람을 막아줄 벽도 없고 배설물로 질척질척한  한국식 마구간과 너무나 다른 것 같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일반 서민의 가옥에서는 가축이 머무는 곳과 사람이 사는 곳이 같은 건물 안의 같은 공간 안에 위 아래로 함께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농촌에서 우릿간이 사람 사는 집과 떨어져 있던 것과는 다른 것이지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너댓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윗쪽"에는 사람이 살고 그 아래 같은 건물 내부에서의 "아래쪽"에는 가정의 큰 재산인 가축들이 함께 머무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 그림: 같은 건물 내부에 윗쪽의 사람이 머무는 곳과 아래쪽의 가축이 머무는 곳으로 나뉘어져 있는 파레스타인 서민 가옥의 내부의 아래쪽에서 태어난 예수  (구글 이미지 검색)

그러니까 "예수께서 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약간 풀어서 다시 번역하면, "가옥 내부의 위쪽에 있는 객실(카타뤼마)에는 빈 공간이 없어, 가옥 내부의 아래쪽에 있는 우릿간에서 머물며 해산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사실, 누가복음이 소개하는대로 그 무렵이 호적을 위해 고향 마을이 붐비는 때라면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들이 화투판을 벌리고 죽치고 앉아 북적대고 있을 윗쪽 공간보다는 본래의 용도가 우릿간이긴 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그곳이 요셉 부부를 위해 훨씬 한갓지고 마음 편한 공간이었을 것도 같습니다.


* 고세진의 논문 "성경번역의 문화적 과제"를 주로 참고했고 오강남이 쓴 책 "예수는 없다"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 부근을 참고했습니다. 

by 오늘여기 | 2007/12/24 20:55 | 트랙백 | 덧글(1)

자기 실현적 예언: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기대라든가 선입관을 가지면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 긍정적인 기대가 실현되는 것을 희랍신화를 따서 피그말리온(Pygmalion) 효과라고 하고, 부정적인 선입견이 실현되는 것을 스티그마(stigma, 낙인) 효과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무슨 징크스라든가 그런 것 만들지도 않고, 점을 친다든가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하다보면 어릴 적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언제 들은 이야긴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할머니가 중1 때 돌아가셨으니까, 적어도 30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할머니한테 들은 다른 옛날 이야기는 별로 기억에 없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비교적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어떤 젊은 총각 선비가 있었는데 아주 점을 잘 쳤다고 한다. 아침마다 점을 치는데 하루는 아침을 먹다가 숟가락이 떨어지더라나. 아, 오늘 내가 점을 안 쳐보고 밥을 먹고 있구나 싶어, 그날 따라 아주 신중하게 점을 쳐봤더니 자기가 애지중지하는 벼루가 밤 열시경 박살이 나는 점쾌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 종일 도대체 저게 왜 깨질까 걱정을 하다가 밤 열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벼루를 한쪽 선반에 올려놓고 잘 관찰하기 시작. 아니, 도대체 저게 왜? 

조금 지나니까, 총각 선비의 어머니가 이르시는 말씀이, 지금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어미가 매우 바쁘니 장독대를 모두 덮어달라고 했다 한다. 근데 열시는 다가오는 것 같고 도저히 궁금하기는 하고 해서 "어머니 잠깐만요, 잠시 후에 제가 할게요." 그런 식으로 대꾸하고 넘겼는데 어머니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몇번이나 계속 독촉을 하더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선비도 "잠깐만요"를 연발. 그렇게 몇차례 실랑이를 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한 어머니가 선비 방에 건너와서 선비를 보니 무슨 급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벼루를 모셔놓고 그저 뚫어지게 보고 있는 꼴이 아닌가?  성이 난 어머니는 "아니, 이까짓 게 뭔데 이것만 노려보고 앉아서 어미 부탁하나 안 들어주고 있느냐?"며 벼룩을 밖에 집어던졌고 벼루는 그만 박살. 그러고 나니까 바로 관가에서 밤 열시 통금을 알리는 파루소리가 울리더라...   

by 오늘여기 | 2007/08/22 19:27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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