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집의 과부 누이와 통간한 머슴이 천주학의 세력을 믿고...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만열교수가 한말에 수용된 기독교가 우리의 전통적 관습과 부딪히는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종교학벌레님 블로그에서 알게 됨.)

1889년 3월 1일 <대한크리스도인 회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세력있는 양반 하나가 예수교가 있는 고을에는 갈 수 없으니 다른 고을로 발령을 다시 내달라는 내용이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느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제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그 까닭인 듯"

이만열 교수는 이런 사례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이런 사례들은 ... 서양 선교사들의 힘을 의지한 기독교도들의 항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갖고 있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 기독교인들에 의한 일종의 반봉건·사회개혁의 의미로 범주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만열 교수의 풀이는, 기독교 세력이 (1) 서양 선교사의 힘을 믿고 "까불었던" 측면도 있겠으나, 거기에는 (2) 부정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과 반봉건 사회개혁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두가지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사례가 백범일지에 등장한 것을 기억한다.

백범일지의 연표를 참조하면 1898년의 일로 추정된다. 김구선생이 명성왕후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 감옥소에 갇혔다가 탈출한다. 탈출 후, 남쪽 지방의 아는 사람 집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는데 충청도 강경에 사는 공씨 성을 가진 어느 物商客主의 집에서도 며칠 머물게 된다.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도 등장하는 강경은 당시 원산과 더불어 전국 2대 포구의 하나로 나라 안에서 가장 번성하던 고장 중의 하나였다.  20세기 초반 충청 이남에서는 가장 먼저 전기와 전화가 들어오고 현대식 병원이 들어서는 등 일찍 개화된 곳으로 천주교와 개신교도 일찌기 전래된 고장이다. (김대건신부가 서해를 통해 귀국한 것을 기념하여 금강변에 세운 유서깊은 나바위 성당은 인근 3km거리 안에 있다.) 

요즘으로 치면 필시 재벌 반열에 속했을 그 객주는 김구선생의 인천 감옥소 동기였다가 먼저 석방된 사람으로, 금전관계로 소송이 걸려 잠시 감옥소에 있을 때 김구선생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 객주의 집은 엄청난 부자인 모양으로 김구선생은 대문 7개를 열고 그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객주의 집에 머물고 있던 어느날 야심한 시각, 집 마당에 소란이 있었는데 객주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객주에게는 한 누이가 있었는데 출가했다가 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와 수절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누이가 하필 그 객주집 상노(밥상을 나르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 머슴)와 통간하여 임신을 했고, 해산하던 중 아기는 무사했으나 산모는 죽고 말았다. 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한 객주는 어릴 때부터 키워준 그 상노에게 자기 새끼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살 것을 명한다. 그러나, 상노는 천주교 신자로서 천주학 신부의 세력을 믿고서 주인 말을 듣지를 않고 객주 집 옆에서 버젓이 유모를 두고 사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싶었던 객주는 야밤에 그 머슴을 불러 내서 거꾸로 매단 다음 그 과부의 어린 자녀(조카)의 손에 망치를 들려주며, "너희들의 원수를 때려 죽이라"고 이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마친 객주는 김구에게 그 머슴을 좀 타일러 줄 것을 청한다.

갑오경장(1894)으로 철폐되었다고는 하나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관행조차 살아있고 신분의 구분이 엄연한 현실에서 어려서부터 그 집에서 자란 상노의 행동은 당시의 봉건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주인 곁에서 얼굴을 들고 살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상노는 먼 곳으로 떠나살라는 객주의 나름 "온건한" 제안을 뿌리치고 주인의 속을 끓이게 한다. 그런 상노의 행동 배경에는, 백범일지의 해석대로,  머슴의 행동을 후견해줄 천주학 신부세력의 현실적 힘이 있었을 것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천주교에서 배운 신분차별을 무시하는 반봉건적 의식이 자리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인용한 이만열 교수의 풀이, 곧 구한말의 기독교 세력이 선교사의 힘을 이용한 현실적 힘이 있었음과 반봉건적 세계관을 키우는 토양이었음을 증언해준다 하겠다.

참고: 강경포사건
 

*** 사진 위는 강경성당과 신진물산. 사진 아래는 그 길 건너편에 있는 대선상회. 지금은 초래해 보이지만 아마 이 둘이 강경에서 가장 큰 "물상객주"였을 것이다. 70년대만 해도 건물 안에 있던, 사람이 들어가 작업하는 커다란 냉동창고는 큰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두 곳 중의 한 곳은 孔씨 성을 가진 분이 운영하고 있었다는데,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 물상객주의 후손인지 여부는 아는 바 없다. (강경에서 객주는 1970년대까지도 10여명이 남아 있었으나 1978년을 끝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여기를 클릭하면 바로 인근 거리의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다.

by 오늘여기 | 2008/12/29 11:48 | 종교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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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房家 at 2008/12/30 22:28
여기서 다시 인사를 드리네요.
('오늘여기'가 원래 쓰시는 이름이었군요. 저는 임시로 쓰는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안 그래도 올 겨울에 강경 여행을 하고 싶어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보고 싶게 만드는 또 하나의 사연을 여기서 얻게 되었네요.
일제시대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사진에서 그런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집니다.
(제가 강경에서 보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이지만, 기독교에 관련해서 하나 말씀드리면, 이덕주 선생님의 <충청도 선비들의 믿음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강경의 한옥예배당 이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엠파스 블로그가 이제 없어질 것이고, 내년 초에 싸이 블로그나 이글루스로 옮길 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이글루스로 옮길 결심을 하고 있는데, 이사하고 나면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오늘여기 at 2008/12/31 10:05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느 고마운 분(충북 기독문인들)이 강경을 다녀와서 초기 개신교와 관련한 유산을 잘 정리해 놓으셨네요.

1.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거부 진원지였다는 강경성결교회
2. 말씀하신 한옥예배당으로 추정되는 북옥교회
3. 한국최초의 침례교회라는 강경침례교회

http://blog.daum.net/sky-325/12749863

블로그 옮기시면 저도 찾아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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